2007년 06월 28일
밀양
밀양

주연
전도연 : 피아노 학원 강사 이신애 역
송강호 : 카센터 사장 김종찬 역
조연
조영진 : 박도섭 역
김영재 : 이민기 역
선정엽 : 준 역
송미림 : 정아 역
김미향 : 김 집사 역
이윤희 : 강 장로 역
김종수 : 신 사장 역
김미경 : 양장점 주인 역
오만석 : 목사 역
연출 부문
이창동 : 감독
정승구 : 조감독
각본 부문
이창동 : 각본
이청준 : 원작
아힌입니다. 영화는 오랜만이에요. 좀 노선변경을 할까 합니다. 괜히 안되는 걸 하려고 노력하기보다는 보이는 대로만 쓰려구요. 그게 편하고, 모르는 머리에서 쥐어짜봤자 글만 더 이상해지고, 나중에 제가 다시 읽어봤을 때 '아 이런 기분으로 보았구나' 하고 알 수 있으니까요.
그래서 미리 경고하는데 이 글에는 기독교의 믿음에 대한 글이 상당분 있습니다. 불쾌하시면 피해주세요.
신애(전도연)는 차 사고로 남편을 잃고 아이와 함께 밀양으로 내려와서 살기로 한 피아노 학원 선생입니다. 남편의 고향이 밀양이었거든요. 종찬(송강호)는 신애가 밀양으로 오는 길에 차가 망가져서 알게 된 카센타 사장입니다. 신애는 밀양에서 피아노 학원을 내고 살게 됩니다. 종찬은 신애에게 마음이 있어서 항상 신애의 일에 끼어들어 도와주고 곁에 있으려 하고, 신애는 그걸 싫어합니다. 그리고 여러가지 일들이 일어납니다. 스포일러 때문에 내용을 설명할 수는 없지만, 매우 아픈 일들이고 평범한 일들은 아닙니다. 제 줄거리 설명이 부실하니 한 마디 더 붙이자면 이 영화는 절대 러브스토리 기분으로 볼 수 없는 영화입니다. 인간극장 보는 기분이라면 모를까요.
연기 좋다는 이야기는 할 필요가 없겠죠.
이 영화는 상당히 건조한 듯한, 다큐멘터리 식의 이야기 진행과 촬영을 합니다. 카메라는 어떤 것도 부각시키지 않고 조용히 인물들을 따라다녀요. 전체적으로 평등한 시선으로요. 편집도 갑작스런 부각이나 강조를 느끼게 하는 건 거의 없습니다. 영화를 보는 사람은 사건과 인물을 졸졸졸 따라다니면서 옆에서 바라보는 기분입니다. 이 영화의 시점은 상당히 주관이 적고 관찰자적입니다. (제가 본 밀양에 대한 글 몇몇에서는 이 촬영이 굉장하다고 말씀하시는 분들이 많더군요. 다큐멘터리 촬영이 영화가 될 수 없는 날것인 것에 비하면, 영화가 되는 '날것'을 촬영하기는 정말 어렵다구요. 맞는 말인 것 같지만 잘 모르니 이건 패스할게요.)
그리고 스토리는, 다들 아시듯이 기독교 쪽의 이야기에 비중이 좀 있습니다. 기독교와 관련한 신애의 심경 변화가 후반부의 주요 사건이구요. 제가 여기서 느낀 건 두가지입니다. 하나는 개인적으로. 기독교의 믿음에 대한 문제설정은 내게 전혀 특이하지 않다. 둘은 영화상에서. 신애의 행동양식에 약간 억지스러운 부분이 보인다.
보통 이 영화의 기독교 문제설정에 대해서 많이 이야기 하시는데. 전 그 부분이 전혀 특이하지 않습니다. 어쩌면 제가 그렇게 생각이 깊지 않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집안이 전부 기독교고 언제나 거기서 벗어나려고 해 왔던 제게는 그렇게 특이한 문제설정은 아니더군요. 기독교의 믿음에는 어떤 전제가 필요합니다. 믿음과 배치되는 사실은 배제할 것. 사실 어떤 단체나 사상이나 이념에도 적용되는 말이지요. 어떤 조직이나 생각이 항상성을 유지하려면 최소한의 외부기제에 대한 배제가 필요합니다.
예를 들어서 한 기독교인이 거리에서 구걸하는 사람을 만난다고 칩시다. 자신이 믿는 종교에 따르면 분명히 적선을 해야 하지만, 경제적 이유에서건 어떤 이유에서건 적선을 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경우에 교인은 믿음과 배치되는 사실을 배제할 필요가 생깁니다. 교인의 믿음 : 적선을 할 것. 교인의 행동 : 적선을 하지 않았음. 이때 교인은 자신의 행동을 불편한 기분으로 상기하다가 잊어버리거나, 혹은 자기합리화를 할 수 있습니다. '그래 저 걸인은 사실 장애인이 아니라 장애인인 척 하는 것 뿐일 거야.' 하는 식으로요.
현실에서 교인이 믿음과 다른 행동을 했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교인이 믿음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자기합리화나 망각이 필요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 사실이 계속적으로 자신의 믿음과 배치될 테니까요. '아 이런 나는 믿음을 져버렸어. 이래서는 안 되는데!' 종교적인 교리가 진리라고 생각하더라도, 종교의 원칙을 100% 따르고 살 수는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현실에서 자신의 믿음과 배치되는 일에 대해서는 언제나 적절한 배제가 필요합니다. 머리속에서 적당히 한쪽 구석으로 치우는 거지요. 그걸 머리에 고스란히 담아두면 죄의식과 갈등만 커질 테니까요.
죄의식과 갈등이 커져 회개를 하는 것이 아니냐! 맞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모든 것에 대해서 회개하지는 않습니다. '하나님 죄송합니다 오늘은 모기를 열마리나 잡았어요. 이 잔인한 인간을 용서해 주세요.' 대부분의 사람에게 이건 건 무리입니다. 큰 잘못에 대해서 회개할 수는 있지만, 우리가 인식하더라도 적당히 넘어가는 일들, 혹은 인식하지 못하는 일들에 대한 총체적인 회개는 불가능합니다. 결국 모든 신자들은 믿음과 반대되는 현실을 배제합니다. 그 정도는 사람에 따라 다르지만요.
그리고 영화에선 이런 부분을 주로 부각시킵니다. '거짓말이야~' 하면서요. 맞아요. 종교는 거짓 없이 존재할 수 없습니다. 그게 스스로에게 하는 거짓말이라 하더라도, 거짓말은 종교에 꼭 필요한 요소입니다.
신애의 경우는 자신의 믿음과 배치되는 현실을 배제할 수 없었습니다. 다른 신자들은 모두 자신의 믿음과 배치되는 일들을 인식에서 배제해 가며 믿음을 가집니다. 하지만 신애는 도저히 '모든 것을 용서하시는 하나님' 이라는 교리를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신애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거든요. 신애가 보기에 죄의 처벌과 용서에 대한 우선권은 자신에게 있습니다. 자신이 피해자니까요. 하지만 하나님은 모든 것을 용서할 수 있습니다. 그분은 사랑과 회개의 주인이니까요. 신애는 자신의 정당한 권리가 하나님에게 이양되어 있다는 교리를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그의 죄값은 내 거야!' 하지만 그렇다고 하늘의 그를 완전히 버릴 수도 없었습니다. 지금까지 자신이 그에게 온전히 속해 있었거든요. 그래서 그런 혼란을 겪게 되지요.
두번째인데, 신애의 행동은 후반부로 갈수록 설득력이 떨어집니다. 우선 관객이(혹은 제가) 신애에게 감정이입할 수 없다는 겁니다. 영화에서의 상황은 굉장히 특이한 것인데다가, 기독교 비신자는 경험 없음에서, 신자는 불편함 때문에도 감정이입이 힘듭니다. 물론 지금 정도로도 머리로 이해는 되요. 아 그렇게 해서 그렇게 된 거구나. 하지만 그렇게 한다고 해서 그렇게 해야 돼? 하는 생각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습니다. 관객을 설득하기 위해서는 신애가 그렇게 변화는 과정과 이유와 상황을 더 제시했어야 합니다. 이 영화에서 보여주는 신애의 행동 정당성은 1234+5678=6912 정도밖에 안 됩니다. 인위적이라는 느낌을 받을 수밖에 없어요. 좀 더 관객을 이해시키고 영화로 잡아끌기 위해서는 11+22=33 정도는 되어야 합니다.
게다가 이 영화의 시점은 철저히 객관적입니다. 이건 두 가지 면에서 문제가 됩니다. 하나는 객관적인 시선은 관객에게 강요하는 힘이 약하며, 둘은 객관적인 시선에서 조금이라도 잘못된 것이 더 잘 보인다는 겁니다. 이 영화는 말했듯이 거의 개입하지 않는 관찰자적인 시점을 보여주는데, 그렇기 때문에 관객에게 감독의 의사를 강요할 수 없습니다. 조금 억지스러운 부분이 있더라도 편집과 촬영으로 그 부분에 힘을 실어준다면 관객은 납득합니다. '아 이렇게 강하게 말하다니. 정말 그런 거 같아.' 큰 목소리로 인해서 설득되는 거지요. 작은 결함일수록 이런 데 묻혀서 보이기 힘듭니다. 이 영화는 그렇지 않습니다. 조근조근한 목소리 속에서는 작은 결함도 잘 들리죠. 좋은 태도라고 생각해요. 영화로 승부하겠다는 거니까.
하지만 후반부 신애의 행동양식에 대한 타당성이 부족하다면 문제가 되죠. 말했든지 객관적인 시점이기 때문에 관객들은 신애의 행동양식에 의문을 제기할 수 있는 여지를 가집니다. 심리적으로 거리가 있으니까 결함이 잘 보이는 거죠. 간단히 말해서 면회신을 좀 더 극적으로 바꾸었다고 생각해 봅시다. 면회 중간에, 혹은 끝나고 신애의 얼굴을 클로즈업 한다든지, 소리를 극대화 한다든지, 아니면 신애의 행동양식을 바꾼다든지. 이런 경우는 비록 조작적이더라도 관객에게 감정을 그대로 전달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영화는 그렇게 안 했어요. 훌륭하지만, 그렇다면 후반부를 조금 더 다듬었다면 좋았을 겁니다.
거의 감상기군요. 뭐 감상대로 쓰기로 했으니까요.
1. 나에겐 철학적인 임팩트가 없었다. 2. 납득이 안 되서 인위적인 기분이 든다.
별셋.
태클 환영. 여러가지 의견을 들으면 좋지요. 근데 싸움은 패스..

주연
전도연 : 피아노 학원 강사 이신애 역
송강호 : 카센터 사장 김종찬 역
조연
조영진 : 박도섭 역
김영재 : 이민기 역
선정엽 : 준 역
송미림 : 정아 역
김미향 : 김 집사 역
이윤희 : 강 장로 역
김종수 : 신 사장 역
김미경 : 양장점 주인 역
오만석 : 목사 역
연출 부문
이창동 : 감독
정승구 : 조감독
각본 부문
이창동 : 각본
이청준 : 원작
아힌입니다. 영화는 오랜만이에요. 좀 노선변경을 할까 합니다. 괜히 안되는 걸 하려고 노력하기보다는 보이는 대로만 쓰려구요. 그게 편하고, 모르는 머리에서 쥐어짜봤자 글만 더 이상해지고, 나중에 제가 다시 읽어봤을 때 '아 이런 기분으로 보았구나' 하고 알 수 있으니까요.
그래서 미리 경고하는데 이 글에는 기독교의 믿음에 대한 글이 상당분 있습니다. 불쾌하시면 피해주세요.
신애(전도연)는 차 사고로 남편을 잃고 아이와 함께 밀양으로 내려와서 살기로 한 피아노 학원 선생입니다. 남편의 고향이 밀양이었거든요. 종찬(송강호)는 신애가 밀양으로 오는 길에 차가 망가져서 알게 된 카센타 사장입니다. 신애는 밀양에서 피아노 학원을 내고 살게 됩니다. 종찬은 신애에게 마음이 있어서 항상 신애의 일에 끼어들어 도와주고 곁에 있으려 하고, 신애는 그걸 싫어합니다. 그리고 여러가지 일들이 일어납니다. 스포일러 때문에 내용을 설명할 수는 없지만, 매우 아픈 일들이고 평범한 일들은 아닙니다. 제 줄거리 설명이 부실하니 한 마디 더 붙이자면 이 영화는 절대 러브스토리 기분으로 볼 수 없는 영화입니다. 인간극장 보는 기분이라면 모를까요.
연기 좋다는 이야기는 할 필요가 없겠죠.
이 영화는 상당히 건조한 듯한, 다큐멘터리 식의 이야기 진행과 촬영을 합니다. 카메라는 어떤 것도 부각시키지 않고 조용히 인물들을 따라다녀요. 전체적으로 평등한 시선으로요. 편집도 갑작스런 부각이나 강조를 느끼게 하는 건 거의 없습니다. 영화를 보는 사람은 사건과 인물을 졸졸졸 따라다니면서 옆에서 바라보는 기분입니다. 이 영화의 시점은 상당히 주관이 적고 관찰자적입니다. (제가 본 밀양에 대한 글 몇몇에서는 이 촬영이 굉장하다고 말씀하시는 분들이 많더군요. 다큐멘터리 촬영이 영화가 될 수 없는 날것인 것에 비하면, 영화가 되는 '날것'을 촬영하기는 정말 어렵다구요. 맞는 말인 것 같지만 잘 모르니 이건 패스할게요.)
그리고 스토리는, 다들 아시듯이 기독교 쪽의 이야기에 비중이 좀 있습니다. 기독교와 관련한 신애의 심경 변화가 후반부의 주요 사건이구요. 제가 여기서 느낀 건 두가지입니다. 하나는 개인적으로. 기독교의 믿음에 대한 문제설정은 내게 전혀 특이하지 않다. 둘은 영화상에서. 신애의 행동양식에 약간 억지스러운 부분이 보인다.
보통 이 영화의 기독교 문제설정에 대해서 많이 이야기 하시는데. 전 그 부분이 전혀 특이하지 않습니다. 어쩌면 제가 그렇게 생각이 깊지 않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집안이 전부 기독교고 언제나 거기서 벗어나려고 해 왔던 제게는 그렇게 특이한 문제설정은 아니더군요. 기독교의 믿음에는 어떤 전제가 필요합니다. 믿음과 배치되는 사실은 배제할 것. 사실 어떤 단체나 사상이나 이념에도 적용되는 말이지요. 어떤 조직이나 생각이 항상성을 유지하려면 최소한의 외부기제에 대한 배제가 필요합니다.
예를 들어서 한 기독교인이 거리에서 구걸하는 사람을 만난다고 칩시다. 자신이 믿는 종교에 따르면 분명히 적선을 해야 하지만, 경제적 이유에서건 어떤 이유에서건 적선을 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경우에 교인은 믿음과 배치되는 사실을 배제할 필요가 생깁니다. 교인의 믿음 : 적선을 할 것. 교인의 행동 : 적선을 하지 않았음. 이때 교인은 자신의 행동을 불편한 기분으로 상기하다가 잊어버리거나, 혹은 자기합리화를 할 수 있습니다. '그래 저 걸인은 사실 장애인이 아니라 장애인인 척 하는 것 뿐일 거야.' 하는 식으로요.
현실에서 교인이 믿음과 다른 행동을 했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교인이 믿음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자기합리화나 망각이 필요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 사실이 계속적으로 자신의 믿음과 배치될 테니까요. '아 이런 나는 믿음을 져버렸어. 이래서는 안 되는데!' 종교적인 교리가 진리라고 생각하더라도, 종교의 원칙을 100% 따르고 살 수는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현실에서 자신의 믿음과 배치되는 일에 대해서는 언제나 적절한 배제가 필요합니다. 머리속에서 적당히 한쪽 구석으로 치우는 거지요. 그걸 머리에 고스란히 담아두면 죄의식과 갈등만 커질 테니까요.
죄의식과 갈등이 커져 회개를 하는 것이 아니냐! 맞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모든 것에 대해서 회개하지는 않습니다. '하나님 죄송합니다 오늘은 모기를 열마리나 잡았어요. 이 잔인한 인간을 용서해 주세요.' 대부분의 사람에게 이건 건 무리입니다. 큰 잘못에 대해서 회개할 수는 있지만, 우리가 인식하더라도 적당히 넘어가는 일들, 혹은 인식하지 못하는 일들에 대한 총체적인 회개는 불가능합니다. 결국 모든 신자들은 믿음과 반대되는 현실을 배제합니다. 그 정도는 사람에 따라 다르지만요.
그리고 영화에선 이런 부분을 주로 부각시킵니다. '거짓말이야~' 하면서요. 맞아요. 종교는 거짓 없이 존재할 수 없습니다. 그게 스스로에게 하는 거짓말이라 하더라도, 거짓말은 종교에 꼭 필요한 요소입니다.
신애의 경우는 자신의 믿음과 배치되는 현실을 배제할 수 없었습니다. 다른 신자들은 모두 자신의 믿음과 배치되는 일들을 인식에서 배제해 가며 믿음을 가집니다. 하지만 신애는 도저히 '모든 것을 용서하시는 하나님' 이라는 교리를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신애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거든요. 신애가 보기에 죄의 처벌과 용서에 대한 우선권은 자신에게 있습니다. 자신이 피해자니까요. 하지만 하나님은 모든 것을 용서할 수 있습니다. 그분은 사랑과 회개의 주인이니까요. 신애는 자신의 정당한 권리가 하나님에게 이양되어 있다는 교리를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그의 죄값은 내 거야!' 하지만 그렇다고 하늘의 그를 완전히 버릴 수도 없었습니다. 지금까지 자신이 그에게 온전히 속해 있었거든요. 그래서 그런 혼란을 겪게 되지요.
두번째인데, 신애의 행동은 후반부로 갈수록 설득력이 떨어집니다. 우선 관객이(혹은 제가) 신애에게 감정이입할 수 없다는 겁니다. 영화에서의 상황은 굉장히 특이한 것인데다가, 기독교 비신자는 경험 없음에서, 신자는 불편함 때문에도 감정이입이 힘듭니다. 물론 지금 정도로도 머리로 이해는 되요. 아 그렇게 해서 그렇게 된 거구나. 하지만 그렇게 한다고 해서 그렇게 해야 돼? 하는 생각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습니다. 관객을 설득하기 위해서는 신애가 그렇게 변화는 과정과 이유와 상황을 더 제시했어야 합니다. 이 영화에서 보여주는 신애의 행동 정당성은 1234+5678=6912 정도밖에 안 됩니다. 인위적이라는 느낌을 받을 수밖에 없어요. 좀 더 관객을 이해시키고 영화로 잡아끌기 위해서는 11+22=33 정도는 되어야 합니다.
게다가 이 영화의 시점은 철저히 객관적입니다. 이건 두 가지 면에서 문제가 됩니다. 하나는 객관적인 시선은 관객에게 강요하는 힘이 약하며, 둘은 객관적인 시선에서 조금이라도 잘못된 것이 더 잘 보인다는 겁니다. 이 영화는 말했듯이 거의 개입하지 않는 관찰자적인 시점을 보여주는데, 그렇기 때문에 관객에게 감독의 의사를 강요할 수 없습니다. 조금 억지스러운 부분이 있더라도 편집과 촬영으로 그 부분에 힘을 실어준다면 관객은 납득합니다. '아 이렇게 강하게 말하다니. 정말 그런 거 같아.' 큰 목소리로 인해서 설득되는 거지요. 작은 결함일수록 이런 데 묻혀서 보이기 힘듭니다. 이 영화는 그렇지 않습니다. 조근조근한 목소리 속에서는 작은 결함도 잘 들리죠. 좋은 태도라고 생각해요. 영화로 승부하겠다는 거니까.
하지만 후반부 신애의 행동양식에 대한 타당성이 부족하다면 문제가 되죠. 말했든지 객관적인 시점이기 때문에 관객들은 신애의 행동양식에 의문을 제기할 수 있는 여지를 가집니다. 심리적으로 거리가 있으니까 결함이 잘 보이는 거죠. 간단히 말해서 면회신을 좀 더 극적으로 바꾸었다고 생각해 봅시다. 면회 중간에, 혹은 끝나고 신애의 얼굴을 클로즈업 한다든지, 소리를 극대화 한다든지, 아니면 신애의 행동양식을 바꾼다든지. 이런 경우는 비록 조작적이더라도 관객에게 감정을 그대로 전달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영화는 그렇게 안 했어요. 훌륭하지만, 그렇다면 후반부를 조금 더 다듬었다면 좋았을 겁니다.
거의 감상기군요. 뭐 감상대로 쓰기로 했으니까요.
1. 나에겐 철학적인 임팩트가 없었다. 2. 납득이 안 되서 인위적인 기분이 든다.
별셋.
태클 환영. 여러가지 의견을 들으면 좋지요. 근데 싸움은 패스..
# by | 2007/06/28 17:04 | 영화, 드라마 | 트랙백 | 덧글(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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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지하철 거지한테 돈 안주는데.. 고등학교이후로... 근데 난 기독굔뎅..-.-; 그거에 대해 죄의식 전혀없음 -.-
내생각엔 아마 하나님은 돈을 주지않은것보다는 '그래 저 걸인은 사실 장애인이 아니라 장애인인 척 하는 것 뿐일 거야.' 라고 생각하는 그 마음에 점수를 깍지않을까싶네.